일과 삶의 균형, 쉽지 않음

책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인정욕구에 기대어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라 한다. 타인으로부터 미움받을 용기를 갖고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길이라 한다. 나는 이 내용을 읽고 꽤 설득됐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일을 하면서 갖고 있는 인정욕구가 내가 견딜 수 있는 수준을 넘을랑 말랑한 수준에서 매일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봤을 때 내가 회사에서 인정욕구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다. 그때 나는 자는 시간 이외의 내 모든 시간을 일에 쏟아부으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내는 성과를 보이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럴 때 나는 회사의 인정을 바라지 않았다. 그게 내 최선이자 최고의 모습이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에서 더 나은 성과를 바란다면 그 일을 할 더 뛰어난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자신에 차있었다(지금 돌아보면 더 뛰어난 사람이 없었을 리 없다, 그런 사람의 수가 적었을 뿐).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던 이때가 내가 회사에서 가장 큰 인정을 받고 고속 승진과 연봉인상을 받던 시기였다.

그 직장을 떠난 이후로 다양한 경험을 쌓고 현재 독일에서 살고 있는 나는 확실히 삶의 가치관이 바뀌었다.

미래에 또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이게 맞지. 내 몸값(내가 가진 단위시간의 가격)이 넷플릭스(…)보다 비쌀 뿐이지 사실상 법인은 수익창출을 위해 사람들의 시간을 산다. 회사가 부가가치를 지닌 결과물을 생산해 내기 위해 구매하는 어떤 다른 재료 혹은 재화와 다름없는 거다. 아파트를 짓기 위해 필요한 철근도, 머그컵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흙도,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코드를 쓰는 프로그래머의 시간도 제품의 재료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시간은 내가 가진 엄청난 재산이다. 나는 내 시간을 한 푼이라도 더 가치 있게 팔기 위해 이 회사 저 회사 인터뷰를 보고 내 시간을 가장 후하게 쳐주는 회사와 나의 시간 납품 계약을 체결하는 거다. 자기 시간을 쉽게 퍼주거나 낭비하는 사람이 가진 시간의 가치는 그리 크지 않음을 의미한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사람의 시간을 산다는 것 자체가 리스크다. 다른 재료나 재화는 정량적, 정성적으로 측정이 가능한 반면 사람의 시간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제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재료들이 모두 같아도 A의 시간을 100시간 넣냐, B의 시간을 100시간 넣냐에 따라 다른 품질의 결과물이 나오는 통제 불가능한 요인이다. 그 리스크를 줄위기 위해 기업은 같은 돈을 주고도 그 시간 납품사부터 더 많은 시간을 뽑아내려 한다. 이게 야근이다. 개인은 더 많은 철근을, 흙을, 코드를 더 싼 값에 납품한다.

한국에서 일할 때 상급자로부터 “밤 11시까지 일하는 저 직원도 있는데, 칼퇴근하는 당신은 그에 비해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헛구역질을 간신히 참았다.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려면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회사의 노예가 되어야 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일하며 느낀 회사가 직원의 시간을 구매하는 방법은 좀 다르다. 독일의 기업들에게는 구매 가능한 시간의 양은 변경이 어렵다. 그렇다면 기업 입장에선 당연히 납품받는 시간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따른다. 그것이 직원 복지로 들어가는 거고, 직원은 지속적으로 더 나은 시간당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지원받는다. 소들이 괜히 클래식 음악 듣고 하는 게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회사로부터 어떤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정해진 시간 내에 내가 제공하는 시간의 품질에 대한 더 큰 확신을 심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 시간 내에 더 많은 양과 품질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싶다. 시간당 생산성, 그것이 충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심적 부담감은 분명 같은 이름의 다른 인정욕구다.

유럽에 살면 일과 삶의 균형이 있다는데, 그건 엄밀히 말하면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말이다. 일도 적당히 하고 퇴근하고 집에선 밥 먹고 게임하고 하면 저절로 그 균형이 맞는다는 말이 아니다. 균형을 잘 맞추려면 내 시간의 질과 가치를 높여서 업무 생산성을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내 개인적인 삶의 루틴을 잘 관리해서 내 시간의 품질을 지속적으로 유지시켜줘야 한다. 그냥 시간 때려 넣으면서 일 열심히만 하면 잘 될 거라고 믿고 살던 한국에서 온 나는 이게 좀 어렵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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