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취업, 어느 나라로 갈까

해외취업은 관광하러 여행 가는 것이 아니니 물가 싸고 음식 맛있고 볼거리 많은 나라가 최고는 아니다. 취업과 이민을 위해 좀 더 무게를 두고 고려해야 할 사항들은 신분(비자, 영주권)의 안정, 급여 수준, 의료와 교육 등의 복지, 일과 삶의 균형, 일자리의 수 등이 있다. 그런데 뭐 나는 됐고, 물가 싸고 음식 맛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거나, 이 도시에 꽂혔다거나 하면 거기 가야지 옆에서 백날 뭐 말해봤자 별 수 없기도 하다. 어디든 일단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공부를 싫어하는 성격(?)인지라 내가 해외취업을 생각할 때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새로운 언어를 익힐 필요가 없는 국가일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유일하게 더듬 더듬이라도 할 수 있는 외국어가 영어였으니 저 조건은 결국 영어권 국가를 의미했다. 영어권 국가로 목적지를 한정한다면 고려 대상 국가가 확 줄어든다. 동남아 국가들은 제외했다. 너무 더워. 습해. 미안 베트남, 미안 싱가폴!

미국 – 미국에서 사는 것의 실질적 장단점을 따지기 앞서, 내가 미국에 가고 싶었던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그건 내가 어려서부터 접한 무수한 영화들이 대부분 미국산이었기 때문이다. 그 효과는 결코 무시할 수 없어서 ‘외국’ 하면 저절로 떠오르는 내 머릿속 풍경은 그냥 미국이다. 그러니까 내가 한국을 떠나 무언가 뜻을 펼쳐보겠다 한다면 세계 최강국, 미국으로 가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렵다. 이 정도 꽂히면 미국의 장단점 따위는 사실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 배가 아파서 앰뷸런스 타고 응급실 한 번 갔다가 8,000만 원이 청구된 지인의 이야기를 들어도 미국 미국 하는 거다. 결국 미국에 가지 못하는 이유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미국에 오고 싶어 하고, 콧대 높은 미국은 석사, 박사 등의 고급인력부터 받아준 다음에, 나머지 나 같은 대졸자 쩌리(…)들은 그냥 무작위로 추첨을 돌려서 당첨되면 받아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내가 원격으로 미국 회사와 면접을 봐서 합격을 해도 비자 추첨에서 탈락하면 미국에 갈 수 없다는 얘기. 그럴 경우, 면접에 합격한 회사로의 입사도 취소되는 건 당연하다. 와 씨 더러워서 원. 이런저런 우회로를 찾아봤는데 미국에서 합법적인 내 신분 하나 만드는 것 자체가 겁내 까다롭다는 건 확실하다. 최소 1년 이상의 준비시간 + 당첨운까지 따라줘야 총기 자유 국가에 합법적 신분으로 입국할 수 있다는 얘기.

캐나다 – 점수를 만들어야 한다. 학력, 경력, 나이 등의 조건 등을 조합해 산출해 낸 나의 총점을 가지고 이민 가부 여부가 결정된다. 그 점수를 만들어내기가 너무 귀찮은 상태에서 캐나다를 적당히 조사를 해보니 국가가 (물론 도시마다 다르지만) 일단 좀 춥다고 했다. 나는 수족냉증(…)이 싫어서 좀 더 포기가 쉬웠다.

호주 – 호주의 날씨는 최고다. 하지만 호주도 캐나다처럼 점수를 만들어야 한다. 역시 점수를 만들어내고 그걸 또 서류로 제출하고 하는 등등의 모든 준비과정이 매우 귀찮았다(이 정도면 이민은 생각을 접어야 하는 거 아냐?). 영국식 영어에 기반한 호주영어라는 것 역시 망설임 포인트. 한 가지 추가적인 문제가 더 있었는데 호주와 영국에서의 차선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과 그 주행방향이 반대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오른쪽에 앉아 운전하고 싶지 않았다.

영국 – 내가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영국인 리크루터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느낀 영국 영어는 미국식 영어와 그 발음에서 차이가 매우 컸다. 영국에서 살다 보면 자동차 오른편 운전석에 앉아서 그런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하게 되겠지? 하고 생각하다가 패스.

위 국가들은 오직 ‘영어’라는 조건만으로 추린 대상 국가들이다. 한국에서 일을 하다가 문득문득 해외취업병이 걸리면 언제나 위 국가들 사이에서 자료조사나 하다가 흐지부지하기를 몇 년, 어느 날 우연히 잡코리아에 올라온 독일 리크루팅 회사의 채용공고를 읽었다. “… 독일의 스타트업 회사들은 대부분 영어로 일을 합니다.” 오… 독일어로 일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비자는 어떨까? 그날 독일에 대해 조사를 좀 해봤다. 취업을 하면 비자를 준다. 끝. 점수나 뭐 그런 거 맞출 필요 없어? 와 간단해. 추가적으로 IT 직종을 포함한 부족직군의 경우 좀 더 좋은 비자(블루카드)를 발급해 주고 이 비자를 가진 사람의 배우자도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 또한 더 짧은 시간 안에 영주권 신청 자격을 준다. 이거지. 이렇게 해야 사람이 좀 가지.

즉시 내 머리는 독일에 가야 하는 합당한 이유들을 만들어냈다. 일단 가서 직장을 구하면 일단 100% 안정적인 신분이 된다. 독일은 선진국. 낮은 실업률, 높은 고용안정성, 짧은 연간 평균 근무시간, 의료비 무료, 교육비 무료, 연간 최소 25일의 법정휴가일수. 회사에서 영어로 일을 한다고 하니까, 독일어는 일단 가서 천천히 공부하지 뭐. 여러 나라들이 다닥다닥 붙은 유럽에 위치해 이곳저곳 여행하기 최적의 국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에서 풀악셀 한번 밟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기다. 독일이 나를 부른다. 어느 도시로 갈까? 베를린. 왜? 영화를 봐봐, 세계의 모든 스파이들은 베를린으로 모인다. 베를린이 세계에서 제일 간지나는 도시라는 건 누구도 부정 못하지. 고민 끝.

국어가 영어인 나라가 아니라 일을 영어로 하는 나라 정도로 필터링에 관대함을 베풀면 미국, 캐나다, 호주 말고도 많은 나라들이 가능해진다.

나는 그날 저녁 아내에게 베를린에 가서 사는 건 어떨지 물었고, 우리는 다음 날 각자의 회사에 퇴사를 통보했다. 그로부터 반년 후, 우리는 집도 직장도 없이 일단 독일에 입국했다. 3년 후에 나는 영주권을 받았다. 지금은 폭스바겐에서 일하고 있다. 이미 많은 유럽 나라들을 여행했지만 아직도 가볼 곳이 많다. 아우토반에서 시속 245km/h까지 풀악셀 밟아봤다. 그리고 독일어 겁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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