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스파이라서 베를린에 간 건 아니다

6년 반 전의 10월, 베를린 테겔 국제공항(TXL, 지금은 폐쇄)을 나오던 나와 아내를 아직도 눈앞에 4DX로 그릴 수 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눈앞에서 지나다녔고 나의 시간만이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생소한 냄새, 처음 보는 풍경,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외국인들과 알파벳처럼 생겼지만 읽을 수 없는 광고판과 베이지색 벤츠 택시들. 그 두근거림.

우리는 빵빵한 백팩을 하나씩 메고 각자 낡고 커다란 캐리어 하나와 더 낡은 이민가방을 끌고 있었다. 이 네 개의 가방에 나누어 담은 짐들은 결혼한 지 1년이 지난 당시 시점에서 우리와 베를린으로 함께 날아온 우리의 모든 살림살이였다. 아직도 그립다 팔아 치운 LG 냉장고. 그립다 우리의 시몬스 침대. 그 침대 장난 아니게 숙면에 좋았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택시 승강장으로 향했다. 표정을 봐서는 친절한지 불친절한지 도통 알 수 없는 택시기사에게 휴대폰에 미리 캡처해 둔 에어비앤비 숙소의 주소를 보여줬다. 택시 기사는 우리에게 뭐라고 몇 마디 했는데 우리가 독일어를 못 한다는 것을 알고는 더 이상은 말을 하지 않았다. 서늘한 밤거리를 가르며 달리는 차 안에서 창 밖을 내다봤지만 볼만한 무언가는 없었다. 밤 10시가 넘어 차가 없는 길거리를 거침없이 달리는 창 밖으로 띄엄띄엄 노란 가로등이 지나갔지만 대체로 그 깜깜했던 그 창밖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모른다는 점에서 내 앞으로의 미래와 다름없었다. 당시를 회상해 보면 우리는 택시 기사가 길을 뱅글뱅글 돌아와도, 적당히 아무 곳에나 세우고는 도착했다고 우릴 버리고 떠났어도 전혀 알지 못했을 거다.

하루 전에 나는 한국에 있었다. 서른 중반까지 해외라고는 가까운 일본, 중국, 동남아 등에 관광과 출장을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오늘 나는 베를린에 있다. 처음이다. 독일에 온 건 처음이다. 아니, 유럽도 처음이다. 반년 전까지는 나도 한국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일하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베를린이라곤 영화 본 시리즈에서나 보던 전 세계 스파이들이 일단 모이고 보는 도시 아니었던가.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됐을까, 내 인생 어떤 시점에서의 선택들이 나를 결국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엄청난 의미가 숨어 있든, 그냥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든, 일단 나는 그걸 좀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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