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순간에 삶은 이미 재구성을 시작한다

친구를 따라 전공을 선택한 대학의 졸업을 삼성 입사 불합격으로 장식해 상심한 나는 서울로 무작정 올라와 웹개발자가 됐다. 당시 누나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얹혀살았다(이후 누나는 그 유명한 이대 나온 여자가 된다). 아무리 회상해 봐도 내가 누나 집에 들어갈 때 어떤 짐을 어떻게 챙겨갔는지 생각나지 않는 걸 보면 당시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없었다.

노량진에서 구로디지털단지로 출퇴근을 했다. 역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구로..라니.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며 술 마시고 또 다음날 출근하길 반복했다. 어느 날은 아침에 바지를 입으려고 한 발로 섰는데 중심을 잃고 휘청 하면서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와 화장실로 달려가서 토했다. 또 다른 어느 날 아침은 누나가 오뎅국을 끓여줬는데 술 마신 다음날이었던 나는 건더기를 손도 대지 않고 국물만 먹었다가 누나와 싸웠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5층에 있던 누나와 함께 살던 투룸에서 나는 딱히 좋은 경험의 기억이 없다. 서울의 삶은 팍팍했다. 각박하고, 마음 둘 곳도 없었다. 그냥 살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누나와 조금 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즐거운 기억을 만드는데 노력을 기울일 것 같다.

회사 집 쳇바퀴 생활을 반년쯤 했을 때, 친한 친구 하나가 동영상을 찍어 웹사이트를 운영하자고 했다. 반쯤 돌아이 행동들을 하는 우리를 촬영, 편집해 온라인에 영상을 올리고 공유하는 웹사이트. 회사 일에 영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나는 입사 7개월 만에 퇴사를 하고 동영상 웹사이트를 시작했다. 동영상을 촬영해 업로드하고 직접 만든 웹사이트에서 공유하는 사업. 그렇다, UCC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는 ‘UCC가 뜨니까 이걸 해보자’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다. 하고 싶었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작했는데 때마침 국내에서 UCC 열풍이 시작됐다. 지금은 유튜브가 그 역할을 하고 있고, 당시에도 유튜브가 있었지만 그 정도로 흥하진 않았었다. 대신 네이버나 싸이월드, 엠파스(…)등이 각자의 동영상 플랫폼을 개발하고 주류가 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플랫폼이 있으면, 이제 콘텐츠를 채워야 한다. 그러면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 있어야 하고. 그게 우리였다. 우리의 콘텐츠는 파격이었다. 온갖 부끄러울 짓을 뻔뻔스럽게 다 하고 다니는 우리는 한량과 사고뭉치 중간 어디쯤의 모습으로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의 동영상은 위의 포털사이트들의 메인화면에 한 번 이상씩 노출됐으며, 그때마다 저렴한 호스팅을 사용하던 우리의 웹사이트는 늘 트래픽 초과로 닫혀 버렸다.

생방송 라디오 인터뷰도 하고, 신문 기사에도 났다. 뭔가 여기저기서 우릴 찾는데 수입이 없던 시절이었다. 당연하지, 돈을 버는 방법을 몰랐으니. 이 즈음해서 대박 사건이 하나 터진다. 우리의 동영상들을 본 케이블 음악 방송 MTV Korea의 한 PD가 우리들의 똘끼를 높이 사 연락을 해 왔다. 자기와 프로그램을 하나 해보자 했다. 방송국에 가서 미팅도 했다. 우리는 거절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PD, 작가와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대본을 외우고, 연기를 했다. 내 직업은 연기자. 와- 나 연예인이다(…). 우리의 프로그램이 방송된 다음날이면 늘 PD와 작가로부터 시청률을 전해 듣고는 그들과 함께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어느 날 우리의 오피스텔(회사이자 거주지) 초인종이 눌렸다. 한 중학생이 찾아와서는 팬이라 했다. 음? 우리는 주소를 노출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여기를 알았을까? 다른 날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또 웬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저기요.. 그분들 맞으시죠..? 잘 보고 있어요.” 하고 얘기했다.

이 즈음해서 우리는 서로 연예인병에 걸린 척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것에 대한 즐거운 기분을 누렸던 것 같다. “아~ 이거 사람들이 너무 알아봐서 어딜 나가서 돌아다닐 수가 없네..” 뭐 이런 헛소리를 잘도 떠들어 댔던 것 같다.

어느덧 몇 달의 시간이 흘렀다. 어떤 변화도 찾아오지 않는 시기가 길어지고 있었다. 반짝했던 인기는 사그라들고, 콘텐츠 소재는 떨어졌다. 우리는 어느덧 사업을 계속하기 위한 생활비를 마련한다는 명목 하에 웹개발 알바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또 좀 하다가 어느 순간 동영상이던, 콘텐츠던 흥미를 잃게 됐다.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살 길을 찾으러 갔다. 동영상 사업을 하자고 웹사이트를 만든 지 2년이 흘러 있었다. 나는 이후로 안랩에 계약직 QA로 취업해서 다시금 IT 세계로 발을 들였다.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르며 나는 내가 겪었던 그 2년의 의미를 반추해 볼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 생판 모르는 거라고 할지라도 당신이 그걸 시작하는 그 순간, 당신 앞에는 그쪽으로 가는 길, 방법과 기회들이 광활하게 펼쳐지고 당신의 생활, 경험, 인맥들이 그 길에 맞게 재구성된다. 그러니..
  •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건 용기를 내어 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 초심자의 행운을 만나 물이 들어온다면 노를 저어라. 물이 들어왔으면? 그래도 노를 계속 저어라. 물의 드나듦과 관계없이 노는 언제나 계속 젓는 거다.

그때 내가 만든 몇몇 개의 콘텐츠가 여전히 인터넷 구천을 떠돌고 있는데, 그걸 보는 것 자체가 나에게 고역이므로 굳이 여기에까지 남기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저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경험과 교훈이 있었음을 내 링크드인 이력서의 첫 직장과 두 번째 직장 사이의 2년의 공백을 보며 회상하는 선에서 충분하지 싶다.

이 경험을 가짐으로 해서 나는 그 이후로도 인생의 방향을 크게 꺾어 버리는 결정들을 자주 내렸고, 그중 하나가 집도 직장도 구하지 않은 채 베를린으로 출국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미래의 인생에 과거의 경험들이 미칠 영향을 생각해 보면 지금 시점에서의 경험들을 다채로운 색깔들로 채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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