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한 병과 소주 반 병

내 오랜 친구 하나는 1년에 한 번씩 나를 만날 때면 우리 둘 다 담배를 끊은 지 오래되었음에도 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담배가 당긴다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함께 마셔대던 진한 대학생활의 기억 속에 우리는 거의 항상 어깨동무를 하고 담배를 피우며 비틀대며 웃어젖히고 있었으니, 그 과거의 모습을 완성시키는 데에는 담배가 필요한 탓이다.

어제는 여느 때와 같이 일을 하고 밥을 챙겨 먹고 운동을 한 후 샤워를 마치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 상태로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동네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녁 먹음?”

… 우리는 오랜 반복을 통해 파블로프의 개처럼 특정 조건에서 눈앞에 없는 무언가를 떠올리며 반응한다. 그러니까 저 친구가 나에게 물어본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받은 연락의 출처가 저 친구임을 알았을 때 이미 나의 뇌는 ‘하.. 방금 샤워 끝냈는데 술 마시러 나가야 하나..’ 하는 고민을 시작했고 10분 후엔 이미 현관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렇게 동네 친구를 만나서 밥 먹으러 걸어가는데 비가 갑자기 마구 쏟아져서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달려갔는데 그 사이 나는 비에 쫄딱 젖었다. 펑펑 내리는 비는 거리의 색을 진하게 물들이고, 무언가 주위를 생동감 있게 느껴지도록 해 반 병 마실 소주를 한 병 마시게 만든다. 그러다 맥주도 마시고 어쩌다 보니 반주만 하려던 계획은 이미 자취를 감췄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살짝의 두통과 울렁이는 속을 느끼며 일어났다. 그 숙취는 내가 아침루틴에 들이는 정성의 진지함에 영향을 미쳐서 대충 구색만 맞추고 지나가도록 방해했다. 오늘 일할 땐 하루 종일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의욕 없이 노트북만 두드렸다. 그냥 설렁설렁 대충대충 할 것들을 하면서 내가 그동안 공들여 만들어 온 좋은 루틴과 습관들을 수행할 체력과 의지력이 부족한 상태임을 느꼈다. 내가 내 삶을 가장 아끼지 않고 내던지며 살던 10여 년 전의 하루를 다시 산 기분이었다.

술은 이렇게 나를 과거로 데려가서 과거에 내가 갖고 있던 온갖 나쁜 생활과 습관들을 끄집어낸다. 그 삶 속에서 살고 있을 땐 모른다. 좋은 습관을 몸에 하나하나 들여서 지속 가능한 괜찮은 생활을 만들어 놓고 나면 과거의 막(…) 돼먹은 삶이 보이는 법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술이 주는 기쁨보다 좋은 생활루틴이 주는 기쁨이 큼을 알아차리는 경험을 하게 되면, 이제야 비로소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술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할 준비가 된 거다.

그래서 글 제목을 내가 정한 음주 최대치로 정함. 오늘 같은 날은 루틴을 잘하지 못했어도 그동안 잘 해온 나를 칭찬해 주고 마음 편히 하루 푹 쉬면 된다. 그리고 내일부터 또 잘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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