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함, 우리의 옷을 적시는 가랑비

아내가 우리의 첫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상상 속에서 아버지가 독일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유치원에서 차별을 받는 내 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니까 이게 상황이, 아내가 “오빠 나 두줄이야.” 하니까 나는 막 분노했다는 거지.

당장 대책이 필요했다. 추진력이 좋은 나는 한국에서 이민올 때 가져온 먼지 쌓인 독일어 책을 펼쳤다가 ‘아 맞다. 이래서 내가 5년 전에 독일어 공부를 접었었지.’ 깨닫고 다시 책을 덮었을 땐, 펼칠 때 떠올랐던 먼지가 아직 허공에서 날고 있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문득 듀오링고(Duolingo)라는 앱이 떠올랐다. 맞아, 친구들이 이걸로 외국어 공부를 한다고 했어. 그렇게 앱을 설치하고 첫 레슨을 끝마치는데 5분이 걸렸다. 첫 레슨은 빵, 와인, 고마워, 사과 따위(…)의 단어를 읽고 쓰고 발음하는 내용이었다. 가설을 세웠다. ‘이걸 하루 한 시간씩 하면 또 그만두고 말 테니 하루 5분씩만 해보는 건 어떨까..?’

시간이 흘렀다.

딸이 태어났다. 그 사이 나는 듀오링고를 통해 5분, 많게는 30분 독일어를 공부해 왔다. 앱은 내가 44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독일어를 공부해 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 후의 변화는, 밖에 나가면 어리바리 독일어로 묻고, 단어 몇 개 주워듣고 이해하고 뭐 그러고 있다. 이대로 쭉 가면 원어민과 원어민처럼 대화할 수 있겠다는 기대는 없다. 다만 나는 내가 상대에게 원하는 것, 기쁜 것, 빡친(…) 것 등을 표현할 수 있게 되겠지.

아내가 딸과 한국에 있어 세 달간 떨어져 지내야 한다. 나는 버거를 좋아한다. 밥을 챙겨 먹기 싫은 날이면 버거 집에 간다. 치즈버거를 시켜 먹는다. 아내와 있었을 땐 다양한 먹거리로 색채 가득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굳이 먹을 게 없으면 버거를 먹는다. 내 생활은 단조로운 무채색이 됐다. 생각 없이 그냥 계속 가던 버거 집에서 어느 날 갑자기 나를 기억함을 알아차린다. 내가 “할로” 하며 인사를 하며 들어가면. “할로, 치즈버거?” 하며 웃는다. 나는 “야(Ja)” 하고 값을 치른다. 다 먹은 식기를 반납할 때면 “맛있었어?” 하고 묻고, 나는 “응 언제나 아주 좋아”라고 말하고 인사하고 나온다. 나의 생활에도 약간의 색깔이 칠해졌다.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 미뤄만 오던 농구를 하러 갔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자기들끼리 시합을 한다. 나도 시합하고 싶은데. 시합이 없어 코트가 비었을 때 혼자 드리블을 하고 슛을 하다가 집에 돌아왔다. 어차피 혼자 공을 튀기더라도 운동은 운동이잖아? 농구는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그래서 그냥 계속 갔다. 구경꾼들이 종종 피워대는 마리화나 냄새를 맡으며 몸을 풀고 있던 어느 날 한 무리가 나에게 다가왔다. 함께 팀을 이뤄서 지금 5연승을 하고 있는 저 팀을 코트에서 끌어 내자 했다(동네 농구의 룰: 이긴 팀은 계속 코트에 남아 다음 도전팀과 승부한다). 나의 첫 해외 무대 진출이었다. 우리는 5연승 하던 팀을 이겼다. 거기에 2연승을 더 추가한 후, “나는 이제 가볼게. 즐거운 게임이었어.” 하고 주먹인사하고 집으로 왔다. 그날은 온통 낮의 농구 시합 생각에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꾸준함의 힘을 너무 늦게 알게 됐다. 여전히 나는 듀오링고를 하고, 버거를 먹고, 농구 코트에 간다.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것만으로 그것을 잘하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계속 계속하다 보면 변화가 찾아오고, 그 변화는 나를 또 다른 변화와 이어준다. 그 변화가 지금은 막 인생을 바꿀 정도로 커 보이지 않아도, 어느날 뒤돌아 보면 그 변화의 크기에 놀란다. 분명 그 가랑비는 우리의 옷을 흠뻑 적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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