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W와 나

나는 내 차를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SUV이고, 디자인이 아름답고, 검은색이고, 그리고 BMW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RRS(레인지로버 스포츠)를 사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BMW X1 (F48)을 사계 된 가장 큰 계기는 일단 RRS가 너무 비싸서다. 자동차 구매에 있어 가격이 가장 큰 선택 기준 중 하나이기 때문에 딱히 이상할 건 없다. 또 한 가지, 과연 내가 뽑은 RRS가 악명 높기로 소문난 잔고장이 계속 나는 녀석이라면, 그때마다 센터 입고를 하는데 스트레스로 죽지 않을까 생각해 봤을 때 죽을 것 같았다. 만에 하나 산다고 해도, RRS가 센터에 있을 때 타고 다닐 다른 차를 하나 더 살 주차장도, 자금도 없었다.

자동차는 독일 생활 내내 이미 오래전부터 구매를 알아보고 있었다. 당시 아내는 “나는 우리가 왜 자동차가 필요한지 모르겠어.”라는 명언을 남기면서 나를 만류했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자동차를 운전하고 싶었다. 우리가 사는 곳이 자동차와 아우토반의 나라 독일이어서 그런 거였는지, 유럽 많은 국가들을 로드트립으로 여행 다니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는지 모르겠다. 그냥 갖고 싶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 같다. 어느 날 신기한 기회가 왔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가 다임러였는데 우리 콧수염 회장님이 은퇴를 하면서 새로 부임한 회장이 비용절감을 이유로 다임러 그룹 산하의 작은 자회사였던 우리 회사를 통째로 없애 버렸다. 덕분에 나는 퇴직금과 이런저런 해고 수당을 받으면서 급작스럽게 목돈이 생겼던 것이다. 얼씨구나. 다시 직장을 구해야 하는 건 귀찮은 일이지만 자동차를 산다고 해서 직장을 못 구할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건 취업이니까 문제없었다.

BMW에는 여러 종류의 SUV 모델이 있고 내 차는 그중 가장 작은 모델이다. 가격을 포함해 디자인, 크기, 실용성 등 여러 조건을 따졌을 때 자연스럽게 선택됐다. 다임러는 나를 해고했으니 벤츠는 사지 않는 복수를 했다. 자동차 옵션(한국에 수입되는 모델들과 달리 독일에서 BMW를 구입할 땐 세세한 옵션 하나하나를 내가 넣고 빼고 할 수 있다)과 예상 가격을 결정했다. 저축해 둔 돈과 퇴직금을 합치니 일시불로 구매하기에 만 유로 정도가 부족했는데 당시 비엔나에 살고 있는 친구한테 연락해서 빌렸다. 딜러와 예약을 하고 BMW 대리점에 방문했다. 내가 원하는 모델, 트림, 옵션을 하나하나 넣는데 30분은 걸린 것 같다. 그렇게 모든 옵션을 결정하고 나니까 딜러 옆에 있는 커다란 TV에 내가 결정한 모델이 나타나 360도 뷰로 영롱하게 애니메이션 됐다. ‘오. 이렇게 사람을 그 자리에서 홀려서 구입하게 만드는구나.’ 싶었다.

딜러는 (당연하게도) 내가 인터넷에서 알아본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 여기서부터가 협상이다. 나는 말했다.

“그건 예산 초과다.”

“그러면 내가 큰 한 걸음을 갈 테니 당신도 작은 한 걸음을 와라. 가격을 이만큼 크게 낮추는 대신, 이 작은 옵션을 빼자.”

“그 옵션은 포기할 수 없다. XXXX유로로 해달라.”

그러자 딜러는 첫 오퍼보다 숫자를 조금 낮추더니 나에게 말했다.

“이 옵션대로 하면 최최최대한 저렴하게 만든 가격이 이만큼이다. 더 이상의 가격 조정이 불가능하다.”

나는 생각하는 듯 조금 뜸을 들이다가 그냥 말했다.

“나는 이 모델의 이 옵션을 인터넷을 통해 XXXX유로로 구매 가능함을 이미 알고 왔다. 하지만 나는 온라인으로 자동차를 구입하고 싶지 않다. BMW 대리점에서는 당신이 설명하는 내용 중 등록 대행비 같은 이런저런 추가 비용이 발생하니 내가 합리적으로 XXXX유로에 추가로 500유로를 더 지불할 의사가 있다.”

하지만 내가 500유로를 더해 제시한 가격도 딜러가 제시한 가격보다 훨씬 낮은 금액이었다. 딜러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계속 말했다.

“이 가격을 받아들이면 나는 전액 현금 구매 조건으로 지금 계약서에 사인할 거다. 그건 당신과 나의 시간을 엄청나게 아껴준다. 당신은 나를 만나서 1시간도 안되어 자동차 한 대를 판매하는 것이다. 이 가격이 불가능하다면 나는 여길 나가는 즉시 온라인 주문을 할 거다.”

딜러는 내가 당장 사인하겠다는 말을 들을 때 눈이 반짝하더니 말했다.

“이 가격은 나의 매니저로부터 승인받고 진행해야 하는 금액이니 잠깐 기다려줘.”

그러더니 2층에 있는 어떤 유리방에 들어갔다가 5분이 안 되어 나왔다. 그렇게 나는 사인을 했고 3개월 정도 기다린 후에 차를 받았다. 나와 아내는 자동차에게 알알이( RR: 레인지로버(…) )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그렇게 독일에서 우리의 자동차 생활이 시작됐다.

자동차를 받았으니 고사를 지내야지. 고사 같은 거 나는 믿지 않지만, 그래도 해서 나쁠게 뭐 있냐며 주섬주섬 준비하는 아내가 좋다. 우리는 독일에서 구할 수 있는 음식과 술로 고사를 지내기로 했다. 우리는 알알이를 타고 한적한 공원에 가서 독일 소시지를 놓고 보드카를 잔에 받아 절하고 기도를 했다. “우리 가족이 된 걸 환영해. 우리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줘. 우리에게 좋은 경험을 가져다줘.” 보드카를 네 바퀴에 나눠 뿌렸다. 그렇게 이동이 가능한 우리만의 공간을 갖게 됐다.

자동차가 생기자 나만큼 크게 만족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아내였다. 우리는 알알이를 타고 장을 봤고, 호수로 숲으로 근교 여행을 했다. 비가 오는 날 음악을 들으며 드라이브를 했다. 직접 그릴을 까맣게 도색해 주고, 오일과 필터를 갈아주고, 아내와 함께 손세차를 했다. 비엔나에 살던 친구가 베를린으로 이사할 때는 알알이를 몰고 가서 이삿짐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 독일-스위스-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스페인-프랑스-벨기에-독일로 이어지는 로드트립도 다녀왔다. 하루 10시간 1,000킬로미터를 운전해 봤다. 아우토반에서 최고 245km/h로 달려봤다. 코딩을 해서 자잘한 기능들을 수정해 줬다. 알알이는 정말로 우리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줬고, 우리에게 좋은 경험들을 가져다줬다.

다임러를 떠난 나는 지금은 폭스바겐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며 모빌리티 앱을 개발하고 있다. BMW가 좋아서 BMW에서 일하고 싶어 일자리를 좀 알아봤는데 아쉽게도 뮌헨에 본사를 둔 BMW는 베를린에 소프트웨어 개발 부서가 없다.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나는 내 자동차가 좋고, 내가 자동차 인더스트리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도 좋다. 그냥 자동차 관련한 건 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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